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이비드 로빈슨 (문단 편집) === NBA 커리어 === 전역한 로빈슨은 89-90시즌에 데뷔했다. 2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로빈슨은 89-90시즌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전성기를 알렸다. 무려 평균 24.3득점에 12.0 리바운드라는 괴물같은 기록을 과시하며 루키로서 올스타에 뽑히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3년차에서는 NBA에서 단 세명만 기록했던 평균 2.0 이상 블록, 2.0 이상 스틸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수비에서도 크나큰 존재감을 발휘하면서 91-92시즌에는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했다. 93-94시즌에는 샤킬 오닐과의 득점왕 경쟁으로 유명했으며, 결국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71득점'''을 기록했고, 이는 현재까지도 한경기 최다득점 역대 '''6위''' 기록이다.~~[[윌트 체임벌린|이 괴물같은 양반]] 만 아니었어도 최대 3위까지 가능했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스퍼스]]의 동료들은 의도적으로 로빈슨에게 공을 몰아주었다. 그러나 세간의 루머와 달리 클리퍼스 선수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수비했다. 가끔 클리퍼스 선수들도 로빈슨을 내버려뒀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니 다음에 이 항목을 수정하고 싶다면 관련 인터뷰 등 근거 자료를 제시하고 수정하기 바란다. 사실 한 선수가 득점을 무지막지하게 쌓는 경우에 동료들이 공을 몰아주는 건 눈살 찌푸릴 만한 일도 아니며 오히려 당연시되는 케이스다. 샤킬 오닐이 커리어하이 61점을 기록할 당시에도 분위기가 심상치않자 공을 몰아주는 장면을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코비가 81점을 기록할 당시에도 레이커스의 승리가 확실시되던 막판에도 (당시 코비의 맹활약으로 지던 경기를 역전해서 점수차를 여유있게 쌓은 시점) 끝까지 코비 위주로 공격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플옵에서 기록을 위해 이러면 비판받겠지만 정규시즌에서 기록을 앞두고 있는데 공을 몰아주지 않을 이유는 없다. 사실 100득점 당시 [[윌트 체임벌린]]은 상대팀인 닉스가 기록을 내주기 싫어서 일부러 윌트가 아닌 다른 선수들을 고의로 파울해서 자유투를 주는 행위를 저지르자, 감독이 아예 '''[[윌트 체임벌린|체임벌린]]에게 볼 운반까지 하도록 지시했다.''' 이로 인해 이 경기 막판은 난데없는 '''자유투 콘테스트'''가 되는 촌극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건 좀 기록을 지나치게 의식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지만, 로빈슨이나 [[코비 브라이언트|코비]], [[샤킬 오닐|오닐]]의 경우처럼 그냥 공격권을 몰아주는 정도면 문제될 게 전혀 없다. 루머에 흔들릴 것 없이 [[https://www.youtube.com/watch?v=24NLqvKER1c|직접 확인하자.]] 적극적으로 도움수비를 와서 더블팀을 붙이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클리퍼스]] 선수들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때는 지역방어가 허용 안 되던 맨투맨 수비시절이라 포스트맨에 대한 더블팀이 지금보다 더 어려웠고, 클리퍼스가 정상급의 수비팀이 아니란 걸 감안하면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막은 것이란 걸 알 수 있다.[* 오히려 당시엔 이런 경우는 기록의 희생양이라도 안되려고 더 열심히 수비를 했다. [[배리 본즈]]의 홈런 신기록 희생양이 안되려고 다들 피하던 걸 생각해보자. 희생양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박찬호]], [[김병현]] 등 한국 투수들은 정면 승부를 택해 비록 대기록을 내줬지만 언론과 팬들의 호평을 받았다. 후술되는 KBL에서 추태는 1)3점 슛 기록(문경은)과 블록 슛 기록(김주성)을 서로 밀어주는 상부상조(?)가 있었고 2) 그걸 감안하고도 말도 안되는 추태였다. 상대팀 입장에선 적극적으로 기록을 막는게 정상이고, 실제로 클리퍼스 선수들은 그렇게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클리퍼스가 로빈슨이 뭐가 예쁘다고 71점을 헌납하겠는가? 그리고 [[문경은]]/[[우지원]]의 3점슛 타이틀 쟁탈전에서 있었던 "일부러 수비를 안해 상대팀의 대기록 수립을 허용하는" 짓거리는 KBL에서도 엄청나게 비난받고 그 해 3점슛왕 시상을 안 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 행동이다. 하물며 더욱 치밀하게 운영되고 규모와 인기가 비교도 안 되며 역사도 깊은 NBA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간 로빈슨은 매장당했을 것이다. 로빈슨의 진정한 전성기는 다음 해인 94-95시즌이었다. 이 해에 로빈슨은 시즌 MVP를 수상했으며 팀을 리그 최강으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이 시즌에 서부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로빈슨은 하킴 올라주원에게 명백하게 밀리면서 시즌 MVP로서의 자존심을 구겼으며 그가 은퇴할 때까지 쫓아다닌 '새가슴'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로빈슨의 커리어는 96-97시즌에 큰 부상을 당하면서 바뀌게 된다. 이 시즌 샌안토니오는 에이스였던 로빈슨 뿐만 아니라 2옵션이었던 션 엘리엇까지 시즌아웃 당하면서 역대 최악의 승률을 기록한다. 하지만 이게 전화위복이 되어, 97년 드래프트에서 샌안토니오는 대학 최고의 [[센터]]였던 [[팀 던컨]]을[* 던컨은 대학 내내 센터였으나 로빈슨의 존재로 파워포워드로 프로 데뷔하게 되고 커리어의 대부분과 전성기를 파워포워드로 보내게 된다.] 지명하게 된다. 막강 트윈타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둘은 이 시즌에 동시에 20-10을 합작했다. 이후 로빈슨은 팀의 리더자리를 던컨에게 물려주고 그를 뒷바침해주는 사이드킥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결실은 98-99시즌 샌안토니오의 프랜차이즈 창단이래 [[1999 NBA 파이널|최초의 우승]]으로 돌아왔다. 이 시점부터 로빈슨은 팀의 에이스가 아닌 2옵션으로서 던컨을 보좌했다. 02-03시즌에 시즌이 끝나면 은퇴하겠다고 공식선언했다. 그리고 커리어를 통틀어 제일 저조한 성적을 남겼지만 팀의 든든한 기둥으로서의 역할은 변함이 없었다. 쓰리핏을 달성한 샤킬 오닐과[* 이 때 오닐의 주 매치업이 바로 로빈슨이었다. 던컨이 워낙에 뛰어난 기량을 보이던 시절이라 던컨이 오닐을 제압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실제로 오닐을 온몸으로 막아낸 건 제독이었다. 던컨의 주 매치업은 로버트 오리. 물론 농구 특성상 스위치되거나 로빈슨이 벤치에 있을때 던컨이 오닐을 막은 적도 있지만 주로 막은 건 로빈슨.] 코비 브라이언트의 레이커스를 이겨내고 파이널에 올라 [[뉴저지 네츠]]를 맞이하며, 6차전에서 13득점 17리바운드 2블록으로 맹활약하면서 팀의 두번째 우승에 일조했고, 결국 공언대로 로빈슨은 은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